챗gpt에게 받는 위로는 우리에게 문제가 없을까?

거부 당하는 과정에서의 갈등도, 상처도 없다. 그래서 편하다. 하지만 이 편안함은 우리가 연습할 기회를 생략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챗gpt에게 받는 위로는 우리에게 문제가 없을까?
ai 생성형 이미지입니다.
거부 당하는 과정에서의 갈등도, 상처도 없다. 그래서 편하다.
하지만 이 편안함은 우리가 연습할 기회를 생략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김태형, 이시은 코치입니다.

유튜브 댓글을 재구성한 ai 생성형 이미지입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하루의 힘들었던 일, 연애에서의 고민이나 심리적 고통 등을 챗gpt에게 털어놓으면서 위로와 공감, 삶의 지지와 응원을 얻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챗gpt와의 대화를 통해 위로나 공감을 받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번엔 코칭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칼럼은 아니지만, 코칭에서도 위로나 공감 등의 순간들을 함께 나누기에, 편한 말투로 한 번 적어봤습니다.


우리는 슬픔을 누구에게 털어놓을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하루의 힘들었던 일, 연애에서의 고민이나 심리적 고통 등을 챗gpt를 포함한 수많은 AI에게 털어놓으면서 위로와 공감, 삶의 지지와 응원을 얻고 있는 것이 전세계적 유행으로 번지고 있다.

영화 "Her"의 장면 캡쳐

이 영화적 순간이 점점 일어나고 있는 시점이 왔다.

AI가 연구나 자료 정리, 공부 외에도 감정적 대화를 나누는 상대로써도 기능을 하게 되면서, 이제 우리는 친구나 연인이 아닌 챗봇와 대화하고, 그 대화 속에서 위로를 받고 응원을 얻고 있는 시대에 들어섰다.

몇몇 통계에서는 이제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보다도 AI에게 자신의 상태를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도 있을 정도였다.

이렇듯 정말 많은 이들이 AI와의 대화를 통해 '위로받는다', '공감받는다'고 말한다.

물론 실제로 상담 등의 행위에 대한 테스트 과정을 봐도, 상담심리학적 기준에서도 꽤 정확하게 상담을 진행하는 모습도 관찰되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이건 문제가 없을까?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이 글은 AI의 어떤 기술적 문제가 있어서 위로와 공감을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글이 아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AI를 통한 위로와 공감을 받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글이다.

사실은 내가 만든 게 반사되어 돌아오는 메아리

사실 AI와의 '대화'를 기술적으로 이해해보자면, 그것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소통'이 아니다.

물론

"아니 멀쩡하게 잘만 대화가 되는데 왜 이게 소통이 아닌데?"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엄밀하게 이 행위는 '반사'에 가깝다.

즉, 대화라는 것을 하나의 '공놀이'로 비유하자면 사람 간의 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캐치볼 또는 테니스 등을 말하는 것이고,

AI와의 대화란 인간이 공을 던지면 그에 따라 수동적으로 공을 튕겨내는 벽(AI)과 하는 '혼자서 하는 스쿼시'에 가깝다.

벽에 던진 공을 받는 스쿼시는, 인간인 상대가 쳐주는 공을 받는 테니스와 다르다.

즉 챗gpt과의 대화란, 우리가 던진 감정에 대해 어떤 '판단'이나 '공감'을 하기보다는, 가장 '그럴듯한' 문장을 통계적으로 산출해 반사해주는 과정인 것이다.

발화에는 의도가 숨어있고, 챗gpt는 그것 역시 반사한다.

사실 우리가 말하는 대부분의 문장은 감정을 담고 있다.

"오늘 너무 힘들었어." 같은 말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그 안에는 "나를 이해해줘", "공감해줘", "나를 달래줘" 같은 사회적 욕구가 녹아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챗gpt는 이것 역시도 통계적 계산과 언어 패턴 분석을 통해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수많은 대화 데이터를 통해, '이런 말 다음에는 이런 반응이 자주 이어지더라'는 패턴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속상하다고 말하면, 챗gpt는 그 감정이 정당한지 판단하기보다, 위로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과정을 우선시 하곤 한다.
(물론 우리라고 안 그런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일어난다.

AI와의 대화에는 '불편함을 연습해볼 틈'이 없다

이 상황이 왜 문제냐면...

인간 사이의 진짜 대화는 언제나 불편함과 충돌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를 상상해보자.

가끔은 상대 역시 피곤하거나, 또는 나를 싫어하거나, 혹은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기에 위로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의 공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관계를 맺고, 갈등 속에서 성장한다.

인간 관계에서도 일종의 내쉬 균형처럼, 내가 원하는 반응을 받기 위해서는 나도 상대의 세계에 어느 정도는 맞춰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내게 맞춰주려는 사람들 속에서 살더라도, 우리는 내게 맞춰주려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과 공감하려 노력하고 관계 맺으려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챗gpt와의 대화에는 이 과정이 없다.

말을 거는 순간의 나의 감정은 항상 수용되고, 거부되지 않은 채로 온전히 분석된다.

그렇기에 거부 당하는 과정에서의 갈등도, 상처도 없다. 그래서 편하다.

하지만 이 편안함은 우리가 연습할 기회를 생략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즉,

  1. 내가 위로를 받는 과정에서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는 연습,
  2. 혹시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지 살피는 연습,
  3. 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상대를 믿는 연습,
  4.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을 모두 거치고 위로를 받았을 때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구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경험

(...)

이 모든 게 생략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사회성을 기르고 성장하는 기회로 기능하기 때문에, 결국 챗gpt로부터 '나를 거부하지 않는 말'을 많이 접할수록 이러한 기회를 계속해서 놓치게 되는 것이다.

위로는 필요하다. 하지만...

물론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위로와 공감을 받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결코 이런 의도가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꺾이고 무너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누군가의 공감과 위로는 삶을 지탱하는 절박한 힘이 된다.

하지만 공감받는 '느낌', 위로받는 '느낌', 응원과 지지받는 '느낌' 들은,

각자의 삶을 사느라 바쁜 주변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응원하고 아끼기 때문에 건네는 말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너무 쉽게 챗gpt와의 대화를 통해서 확률적 반사로 나오는 모든 공감과 위로의 문장에 위로와 공감을 느끼다보면,

나조차도 다른 사람에게 위로, 공감, 응원등을 해보는 연습을 잊어버리게 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받는 과정을 여러 번 겪어야, 나도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들여야 하는 노력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챗gpt과의 대화는 우리를 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우리가 세상과 마주하며 성장하는 사회적 훈련을 회피하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마치며

모두가 쉽게 챗gpt를 통해 소통할 수 있고 위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우리가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1대1로 진행하는 코칭을 진행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일들이 이런게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글을 단순히 챗gpt, 혹은 그 이용자들을 무작정 비판하는 글이 아니라(우리도 ai 기술들을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다!),

인간으로써의 사회적 기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함께 고민해보았으면 하는 글로 봐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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